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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입니다. 저도 아이가 있는데 오늘은 무슨 선물을 해줘야 할지 벌써부터 지갑에 휑하게 될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합니다.ㅠㅠ 그래도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묘한기분이 드네요^^ 다들 오늘은 아이를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시실 바랍니다. 그런데 어린이날에 역사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분들은 정보를 공유할테니 보시고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듯합니다.

제아들도 워낙 궁금한게 많아서 저도 미리 예습을 해야될듯합니다.^&^

 

 

어린이날의 창시자 방정환에 대하여

 

호는 소파()이며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가 곧 사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천도교소년회 등과 관련을 맺었다. 1917년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하여 손병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 도쿄의 도요[]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또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으며,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1923)를 창간하고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그 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신청년()》 《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동화구연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사랑의 선물》과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학협회,1947),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이 있다. 한편 1957년 새싹회에서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기사내용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대 들어 방정환이 정착시키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어. 방정환은 아동문학가로서 우리나라 첫 아동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고 어린이 단체도 만들었지. 동화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해서 지방마다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대.

그가 어린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천도교의 영향이야. 천도교는 ‘어린이’를 새롭게 정의하고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천도교의 사상 속에서 어린이의 인권에 대한 요구가 가능해졌지. 천도교에서는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므로 아이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어. 방정환은 천도교를 믿는 사람이었고, 이런 생각에 뜻을 같이했던 거야.

방정환이 생각한 ‘어린이’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하며 마음껏 뛰놀고 걱정 없이 지내는 그런 모습이었어.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암울한 삶을 살아가던 시기였지. 그때 어린이들의 실제 모습은 방정환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어. 그때에는 의무교육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교육을 받는 어린이도 많지 많았어. 대개의 어린이들은 농사일을 하거나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을 했지.

비록 현실이 가혹할지라도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날이 만들어졌대.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지.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 행사가 천도교당에서 열렸어. 기념식 뒤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 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아래와 같은 선언문 12만 장을 배포했어. 그 뒤 어린이날은 전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로 발전됐지.

어린이날 기념 포스터

<취지>
젊은이나 늙은이는 일의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생 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정인섭, 『색동회 어린이 운동사』, 휘문출판사, 1981, 53쪽)

이 선언문은 장유유서에 찌든 옛 질서와 어린이 노동으로 대표되는 압박을 없애고 배우고 놀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 사실 이 선언문은 인권선언과 비슷해. 그만큼 어린이운동은 일제강점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지. 곧 어린이를 깨우치고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해서 미래를 이끌 주체로서 길러내는 일이 식민지시대 어린이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어.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로 정해 1923년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했대. 1927년부터는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치렀지. 그런데 어린이날이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일제는 행사를 금지시켰어. 어린이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서는 수업을 했대.

해방 뒤 첫 어린이날 기념식은 1946년 5월 5일 오전 11시부터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와 어린이날 서울시준비위원회 공동 주최로 거행됐어.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등 18개 소년 단체에서 수천 명이 참석했지. 이 자리에서 4명의 남녀 어린이가 다시는 집도 말도 빼앗기지 않고 새날 새 조선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배우겠다는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낭독했어.

우리는 왜족에게 짓밟혀 말하는 벙어리요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집과 우리 글을 찾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는 새 조선 건설의 일꾼이요 새날의 임자인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집도 빼앗기지 않고 말도 잃지 않기로 굳게 기약합니다.

우리는 왜적으로 해서 다른 나라 어린이보다 너무도 뒤졌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서 다른 나라 동무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조선의 어린이인 것을 잊지 않고 단단하고 끈끈하게 뭉치겠습니다.

(<현대일보>, 1946년 5월 6일)

일제강점기에는 ‘어린이날’ 알리기, 어린이도 인격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데 힘썼어. 해방 뒤에는 어린이들이 참가하여 희망이나 포부 따위를 말하고, 모범 어린이를 표창하거나 음악 · 무용 · 사생 · 백일장 같은 대회를 열었지.

해방 뒤 첫 어린이날인 1946년 첫 번째 일요일이 5일이어서 그 뒤부터는 요일에 관계없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됐단다.